고 전민제 회장님을 기리며

김광모
2020-03-11
조회수 207


이름 : 김광모

소속 : 전 중화학기획단 부단장

고인, 상주와의 관계 : 

조문의 말씀 : 


       

고 전민제 회장님을 기리며

한국의 화학공업계의 거인이신 전민제 회장님이 타계하셨습니다. 후세에 길이 길이 기억 되어야 하는 값 있는 많은 업적을 남기시고 돌아 가셨습니다. 60~70년대에 이공학 특히 화학공학을 전공하고 학계나 연구소나 공장에서 경제건설에 종사하신 분이시면 전민제 회장님을 모르시는 분이 없으실 것입니다.
회장님은 저희들이 알고 있는 어느 과학기술계 원로보다 건강하게 사셨습니다. 약 한달 후 4월 21일에 백수 생신을 맞이하게 되어 있어서 회장님이 대한석유공사(유공.KOCO) 기술이사로 계실 때 국내 첫 정유공장 시운전 당시의 기술자 모임인 KOCO Club이 백수생신 축하 모임을 가질려고 계획하고 있었는데 애석하게도 한달을 참지 못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생신 축하도 받으시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이니까 어찌 할 도리가 없으나 슬프기 그지 없습니다.

회장님의 사회생활 생애초기에 저 보다 더 관련이 많았던 분은 안 계실 것으로 알고 감히 회장님의 공적을 삺펴 보면서 추모의 글을 올립니다. 저는 회장님이 유공의 기술 이사로 계실 때 과장으로 약 3년간을 모신 적도 있습니다마는 회장님이 정유공장 건설에 전력을 쏟으실 때인 50~60년대는 상공부에서 정유담당 실무자로서, 회장님의 사업이 번창의 길로 올라 설때인 70년대에는 오원철 수석을 모시고 청와대에 있었기 때문에
회장님을 가까히서 모실 수가 있었습니다.

제가 회장님을 처음 만나 뵈온 것은 57년 7월 이었습니다. 제가 상공부에 들어가서 1년쯤 됐을 때였습니다. 저의 직속 상사였던 타고난 신사인 이종원씨(기좌)가 불렀습니다.
울산 정유공장 복구 사업계획서를 건네주시고는 옆에 앉아 있는 분을 기르키시며 대선배님이라고 소개해주신 분이 회장님이신 전민제씨 였습니다.
명함을 보니까 적산 자산으로 산업은행이 관리하고 있던 울산석유석유회사 관리인이셨었습니다. 일제시 원산에 있는 정유공장을 울산으로 이설하다가 종전으로 중도에 그친 정유시설을 복구하여 일단 3천 배럴의 정유시설로 만든다는 계획이었습니다(사업계획서 필자 보관중)
저는 정유시설이라는 것은 들어보지도 못하고 아무런 사전지식이 없어 청계천에 가서 사진판 책을 한 권 사서 공부를 하고 회장님께 여쭈어 보려고 전화를 했더니 상공부로 뛰어 오셨습니다.
회장님의 설명을 듣고 복구하는 방향으로 기안서류를 만들어 결재를 올렸더니 차관(김송환)선에서 부결되었습니다. 이유는 자금 동원능력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당시 57년도의 한국은 최빈국이어서 정유시설을 건설 한 자금도 없었던것은 당연지사였습니다 당시 한국은 미국이 ICA 원조자금으로 석유류를 KOSCO(석유저장주식회사)를 통해서 배급 받고 있었습니다.
정유시설 복구라고 하는 것은 상상 밖의 일이었습니다.
제가 회장님에게 부결되어 미안하다고 알려 드렸더니 놀라지도 않으셨습니다. 저는 이걸로 끝난 줄 알았느데 아니였습니다. 실무적으로는 불가능 함을 알고 고위층을 동원 했습니다 회장님은 김활란 총장의 주선으로 이승만 대통령에게도 브리핑하셨습니다. 대통령이 상공부장관(김일환)에게 검토를 지시했습니다.
이리하여 정부는 장기영, 고재분 씨 등 거물급이 위원이 된 거국적인 정유공장 건설위원회를 1958년 6월 15일에 설립했습니다. 유야무야 큰 진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회장님은 조선공사(사장 남궁련)가 주체가 된 한국석유주식회사를 설립했습니다. 추진위원회는 울산석유복구 대신에 한국석유의 사업계획을 정부에 건의함에 따라 정부는 한국석유의 2만 바렐 정유공장 건설계획을 승인하고 총 외화소요액 1천 3백만 달러 중 5백만 달러의 정부 보유불 매각 승인을 했습니다.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장면정권이 들어서자 5백만 달러의 매각을 다시 요청했으나 정권이 단명으로 끝남에 따라 아무런 진전이 없었습니다.

1961년 5.16 군사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정식 정부가 생기기 전에 경제건설에 대한 의욕을 보여주기 위하여 시범적으로 정부가 설립되기 전에 울산공업단지 건설계획을 공표하고 성대한 기공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공업단지건설은 정유공장을 중심으로 종합제철과 석유화학단지와 발전소를 건설하는 웅대한 포부였습니다.
1962년부터 시행에 들어간 경제5개년 계획을 작성하였으며 그기에 정부의 최중요 사업으로 정하여 추진키로 하였습니다. 3만 5천 바렐의 정유공장을 국영으로 건설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리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정유 공장을 우리 힘으로 건설 하는 것이어서 상공부에 정유공장건설 추진위원회를 만들고 회장님과 일제시 동경제대 응용화학 석유정제를 전공한 나윤호씨, 공대 이재성교수그리고 오원철과장을 임명하고 제가 간사 역할을 했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일화는 회의를 열 때 마다 전민제 위원과 나윤호 위원이 다투었다는 것입니다 전위원이 발언 만하면 나위위원이 내가 석유정제를 동경제대에서 전공한 최고 권위자이니 자기말이 옳다는 태도로 고성만 지르고 반대를 헸습니다, 전위원은 냉정을 잃지 않았습니다 싸움은 언제나 나위원이 걸었지마 언제나 판정패였습니다. 이것이 회장님이 유공건설의 중책을 맡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국가재건 최고회의는 급하게도 196년1월 26일 대한석유공사(유공 KOCO)를 설립하고 시장에 이성호 제독을, 전민제 위원을 기술이사로 임명하였고 유공은 법률에 근거한 국영기업체인 대한석유공사(사장 이성호)가 설립되었습니다. 건설도중 외화 1천 6백만불 중 3백만불을 지불하고 나니 정부 보유불이 바닥났습니다. 정부는 국영으로 계획한 것을 합작투자로 바꾸고 회사의 자금 비율은 자기자금 30% 차관 70%의 구조로 정하고 차관에 대한 금액은 합작선이 책임지기로 하였습니다. 이것이 시발점이 되어 한국의 모든 외국과의 합작선은 이 재무구조를 따르기로 하였습니다(제1차 5개년계획서 필자보관중.)
여기에 중요한 것은 합작선을 구하는 것 이었습니다 한국과 같은 신생국기에 투자할 회사를 찾기란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의 Major Oil 중의 하나로 부상한 Gulf Oil를 선정했는데 정유업계 소식에 정통한 회장님의 공이 큽니다. 이리하여 자금조달의 난관없이 1963년 12월 기계적 준공 후 시운전을 거쳐 1964년 2월 15일 정상 가동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오늘 날의 정유능력 5백만 바렐의 석유대국을 만드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박정희 혁명정부는 정유공장 건설을 출발점으로 하여 경제건설이 이루어졌습니다.
1차 5개년 계획 의 정책기조가 1) 공업입국 2) 수출 제일주의였습니다. 이에 따라 공장 건설이 활발해면 질수록 외화 부족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서독 파견 광부와 간호사에 의한 서독정부 차관등이 있었으나 태부족이었습니다 외화부족을 해결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구세주가 나타났습니다. 회장님이
유공의 기술이사 자격으로 그 당시 정부 예산과 맞먹는 금액에 해당되는 4천만 불의 차관을 Gulf Oil로 부터 얻었습니다. Gulf Oil은 1963년에 한국에 진출하여 한국의 경제건설에 많은 지원을 해주고 17년 만인 1980년 8월에 한국에서 철수하였습니다. 그 후 대한석유공사는 정부의 민영화 방침에 따라 선경그룹이 인수하여 선경이 한국의 산업발전을 주도하는데 중요한 역학을 하는 기업이 되었습니다.
이상이 한국의 발전에 기본이 되는 국가의 에너지 공급에 기여한 대한석유공사의 발전을 요약한 역사이며 전민제 회장님의 공적이 되기도 합니다. 부족하나마 회장님의 공적을 살펴 보는 중간중간 제가 보는 회장님의 인생관 그리고 사업관을 말씀드렸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린다면 회장님은 아무리 험악한 곳이라도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길이 없으면 만들면 된다는 개척정신을 갖추신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회장닝과 가장 가까운 분을 찾으라면 작년 이맘 때 작고 하신 돌아가신 오원철 수석님을 말씀드리지 않을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오수석을 상공부에서 그리고 청와대에서 20년간을
직속 상관으로 모셨기 때문에 두분을 같은 시기에 모신 사람은 저밖 에 없습니다.
두분과의 관계는 회장님이 대학 7.8년 선배이시고 두분이 사교적인 분들이 아니어서 친구사이는 아니었지만 한국의 경제개발을 위해선는 친구 였았다고 할수 있습니다 회장님이 유공의 기술이사로 계실 때에는 오수석은 상공부에서 유공을 책임지는 과장 국장 광공차관보였으니까 관이 주도하는 시절에 회장님은 오수석의 도움을 받았다고 할수 있습니다. 특히 군의 세력이 막강할 에 민간인 기술자가 생각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수석의 후광이 었었기 때문입니다, 회장님이 잘하셨기 때문에 생긴 인과응보의 결과라고 할수 있습니다. 오원철 수석은 특히 70년대에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 아래 중책을 맡고 일하신 분이셨습니다. 간혹 기술자문이 필요 할 때에 회장님을 불러서 만난적이 있고 1년에 한두번씩 식사를 할 정도 였습니다. 오수석이 회장님의 도움이 필요한 때가 딱 하번 있었습니다. 중화학 공확공업화 정책의 일환으르로 창원에 세계 일류의 기계 단지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 배후도시도 세계일류로 만들겠다는 것이 오수석의 포부였습니다 그런데 국내에는 도시 설계 전문가가 없었습니다. 회장님이 엔지니어링의 사장이었을 때에 일본의 권위자의 자문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전엔지니어링에 일을 맡겼습니다 결과적으로로 창원시는 아름다운 도시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창원이 마산과 진해를 흡수하여 창원 통합시가 되었습니다. 이공로로 전민제 사장님은 박정희 대통령령으로 부터 감사장을 받았습니다.

이제 전민제 회장님은 하늘 나라로 가셨습니다.
후배들과 같이 회장님을 모시고 스시집에도 갈 수 없고 참복 집에 들를 수도 없고 회장님의 초대를 받고
서을클럽으로 갈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전이사님 전이사님하고 불러도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회장님이 주신 값진 말씀과 따뜻한 마음 잊지 않겠습니다.
회장님과 같이 언제나 무슨 일에나 최선을 다하는 인간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주님! 전민제 회장님 바오로 형제님께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2020년 3월 10일

김광모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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